지난 주말 1월4일 토요일부터 시작한 KBS의 아주 오랜만의 정통 대하사극 '정도전'을 아주 감명 깊게 시청하고,
한껏 고무된 기분으로 이전에 다른 블로그에 정리해두었던 글을 옮겨온다.
본 글의 원문은 국내 제일의 역사 관련 커뮤니티라고 사료 되는 네이버 대표카페 '부흥'의 유명 유저 '자중자애'님이 작성한 것으로, 글쓴이는 그저 여러 게시글로 나뉘어 연재 된 해당 게시물을 하나의 포스트로 엮은 것에 지나지 않음을 미리 밝히는 바이다.
[출처] 공민왕 암살사건의 진상에 대하여 (1) (【부흥】네이버 대표 역사 카페) |작성자 자중자애
부흥카페 자중자애님의 연재물을 취합한 내용. 점선 이하부터가 원문내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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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연재글은 이글루스 역사밸리의 동호회지인 <떡밥春秋> 1호에 실렸던 글을 약간 수정보완한 것입니다.
* 김정미씨의 [천추태후 - 잔혹하고 은밀한 왕실 불륜史](아름다운사람들, 2008)에도 제 견해와 비슷한 글이 실려있으니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개인적으로는 김정미씨의 책을 참고하지 않았습니다.
▲ 영화 쌍화점에서 배우 주진우가 연기한 '공민왕'
(1) 기존의 통설과 그에 대한 비판
『고려사』에 따르면 공민왕은 측근들과 더불어 음란한 짓을 즐기다가 살해당했다고 한다.
공민왕의 음란한 짓에 대해서는 『고려사』 「세가」 공민왕 21년(1372년) 10월 갑술일 조에 아주 친절하게 설명되어 있는데, 그 내용을 간추리면 대략 다음과 같다.
'공민왕은 여색을 즐기지 않아서 노국공주가 살아있을 때에도 가까이 하는 일이 드물었다.
노국공주가 죽고 여러 비(妃)들을 들였으나 가까이 하지 않고 밤낮으로 노국공주를 생각하여 마음의 병(心疾)이 생겼다.
항상 자신을 부인(婦人)처럼 화장하고 자제위(子弟衛)를 시켜 계집종에게 난잡한 행동을 하게하고 공민왕은 옆방에서 문틈으로 엿보았다.
마음이 동하면 자제위를 왕의 방으로 불러들여 동성애를 즐겼다. 또한 공민왕은 후사를 얻기 위해 자제위를 시켜 여러 비(妃)들을 강제로 욕보이고 아들을 얻으려 했다.
정비(定妃), 혜비(惠妃), 신비(愼妃)는 죽음으로 거부하였다.
익비(益妃)도 거부했으나 공민왕이 칼을 뽑아 치려 하자 두려워서 공민왕이 시키는 대로 따랐다.'
그리고 공민왕이 암살된 과정에 대한 자세한 기록은 『고려사』 「열전」 반역(反逆) 홍륜(洪倫)에 나온다.
그 내용을 간추리면 대략 다음과 같다.
'공민왕은 나이가 적고 얼굴이 아름다운 자들을 선발하여 자제위에 두었다. 홍륜, 한안(韓安), 권진(權瑨), 홍관(洪寬), 노선(盧瑄) 등이 모두 여기 속했다. 공민왕은 이들을 시켜 여러 비빈(妃嬪)들과 간통하게 하여 아들을 낳아 후사를 보려 하였다. 그러다가 홍륜이 익비를 임신하여 내시 최만생(崔萬生)이 익비의 임신 사실을 공민왕에게 조용히 알렸다. 공민왕은 홍륜 등을 죽여 그 입을 막을 것이며 그 일을 알고 있는 최만생까지 죽일 것이라고 했다. 최만생은 두려워 홍륜 등과 더불어 공민왕을 죽였다.'
그냥 읽기만 해도 여기저기서 모순점이 드러난다. 공민왕이 이 정도로 망가진 상태였다면 정상적인 국정운영이 불가능했을 것이다. 하지만 공민왕은 자신이 죽기 직전까지도 별 탈 없이 국정운영을 잘 해 나갔으며, 심지어는 노국공주의 죽음까지도 정치적으로 이용했을 가능성이 있다. 게다가 자제위와 동성애라? 자제위 멤버들은 남양홍씨(南陽洪氏), 청주한씨(淸州韓氏), 안동권씨(安東權氏) 등 당대 최고의 명문가 출신이었으며, 홍륜은 이미 이희비(李希泌)의 딸에게 장가를 든 유부남이었다. 국왕이 명문가 자제들과 더불어 이런 식으로 행동했다면 가장 먼저 대신들이 들고 일어났을 것이다. 동성애가 금기시되기는 예나 지금이나 마찬가지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공식적인 기록대로라면) 공민왕은 위와 같은 변태행각을 암살될 무렵인 1374년(공민왕 23년) 9월까지 2년간이나 계속했다. 그 2년 동안 비밀은 어떻게 유지했을까? 과연 그 모든 일들이 가능한 일이었겠는가?
따라서 사건의 진상을 처음부터 다시 재구성할 필요가 있다. 조선의 『고려사』 편찬자들이 공민왕을 동성애자나 이상성욕자처럼 묘사한 것은 다분히 정치적인 이유에서였다. 공민왕을 온전치 못한 정신의 소유자로 만들어 놓아야 우왕(禑王)이 공민왕의 아들임을 부정할 수 있고, 우왕이 공민왕의 아들이라는 점이 부정되어야 이성계의 조선 건국이 정당화되기 때문이다. 필자는 일단 공민왕의 심신이 지극히 정상이었다는 점에서 출발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공민왕에 대한 추잡한 기록들은, 아가사 크리스티(Agatha Christie)의 표현을 빌리자면 “연막”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공민왕이 동성애자였다느니, 관음증 환자였다느니, 성 정체성에 혼란을 겪었다느니 라는 따위의 연막을 걷어내고 암살사건 그 자체만을 주목하도록 하자. 무엇이 보이는가?
(2) 고려 밖에서 바라본 공민왕 암살사건
공민왕이 죽고 우왕이 즉위한 뒤, 북원에서는 우왕을 고려국왕으로 책봉한다.
그런데 그 책봉 과정에서 나온 북원 측의 발언이 뭔가 이상하다.
"바얀테무르[伯顔帖木兒. 공민왕의 몽골 이름]왕이 우리를 배반하고 명(明)에 귀순한 고로 너희 나라의 시왕지죄(弑王之罪)를 용서(赦)한다."
“시왕지죄”는 물론 ‘왕을 죽인 죄’라는 뜻이다. 이게 도대체 무슨 말일까? 고려 측의 공식적인 발표대로라면 공민왕 암살범은 내시 최만생과 자제위들이고, 그들은 이미 처형당한 상태가 아닌가. 그런데 왕을 죽인 죄를 용서한다? 이게 가능한 일인가? 게다가 이 북원 측 발언의 말투를 보라. 이 발언을 듣고 있는 사람이 “시왕지죄”를 범했다는 말투가 아닌가. 북원의 사신으로부터 이런 발언을 들을 만한 사람이 당시 고려에 누가 있었을까?
『명사(明史)』 「조선열전(朝鮮列傳)」에 실린 기록은 보다 직접적이다.
'(홍무(洪武)) 7년 ..... (중략) ..... 이 해에 전(顓. 공민왕의 이름 - 인용자)이 권신 이인인(李仁人. 李仁任의 오기(誤記) - 인용자)에게 시해되었다.'
이인임은 공민왕이 죽은 뒤 우왕을 옹립하여 고려의 권력을 쥐고 있었다. 북원과 명에서는 바로 이인임을 공민왕 시해의 주범으로 파악한 것이다. 공민왕이 죽고 이인임은 친(親) 북원 정책을 펴게 되는데, 친 북원 정책을 펴려면 어쩔 수 없이 북원에다가 사건의 진상을 털어놓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또한 이인임이 공민왕 암살범이라야 다음의 기록을 해석하는 것이 가능해진다.
'어떤 사람(或)이 이인임에게 일러 말하길 “자고로 나라의 군주가 시해되면 재상이 먼저 그 죄를 받소. (명) 황제가 만약 선왕의 변고를 듣고 군사를 보내 죄를 묻는다면 공은 그것을 피할 수 없을 것이오. 원(元)과 더불어 화친하는 것이 낫소.”
이인임도 그렇게 여겼다. (명) 황제의 사신 채빈 등이 돌아갈 때, 이인임이 찬성사 안사기를 보내 겉으로는 전송한다 하고 조용히 김의(金義)를 시켜 가던 도중에 채빈 등을 죽여 입을 막게 했다. 김의가 드디어 채빈을 죽이고 북원으로 달아났다.'
이 입막음은 명에 알려지는 바람에 결국 실패로 돌아갔고 명과 고려의 관계는 경색되었다. 어쨌든 중요한 점은 이인임이 명에서 공민왕 암살사건을 추궁하려 들까 두려워했다는 점이다. 위 기록에 나오는 “어떤 사람(或)”이 누구인지 구체적으로 알 수가 없어서 유감인데, 아마 이인임과 함께 공민왕 암살을 모의한 사람일 것이다(필자는 왕안덕일 가능성이 크다고 생각한다. 이인임과 왕안덕은 ‘살아남은 신돈 도당’이라는 공통점이 있다. ‘살아남은 신돈 도당’에 대해서는 뒤에 이어지는 글에서 설명하겠다.).
공민왕이 직접 그린 공민왕의 장인 염제신 초상
그건 그렇고, 명에서는 어떻게 공민왕 암살사건의 진상을 알게 되었을까?
그 점은 공민왕의 죽음을 고하러 명에 갔던 고려 사신 최원(崔源)의 행적을 통해 짐작할 수 있다.
판종부시사(判宗簿寺事) 최원을 명의 서울로 보내 (공민왕의) 상(喪)을 고하고 시호를 청했으며 왕위 계승을 고했다.
우(禑. 우왕 - 인용자)가 판종부사 최원(崔原. 崔源의 오기 - 인용자)을 보내 부고(訃告)를 했다. 그리고 말하기를 “앞서 공사(貢使) 김의가 칙사(勅使) 채빈을 살해했기 때문에 지금 뒤를 이은 왕인 우가 김의를 주살(誅殺)하고 그의 가산을 적몰했습니다.” 라고 했다. 황제는 그것이 거짓이 아닌가 의심하여 최원을 가두고 사신을 보내 조문하고 제사하도록 했다.
(명) 황제가 우리 사신 최원, 전보, 이지부를 석방하여 돌려보냈다.
헌부(憲府)에서 최원을 탄핵(劾)했다. “최원이 명의 서울에 있을 때, (명) 황제는 김의가 (명의) 사신을 살해한 것과 선왕(공민왕 - 인용자)의 시해사건을 물었는데, 최원은 시킨 대로 따르지 않고 나라의 악(惡)을 드러내는 것을 피하지 않았으니 그 죄를 다스리는 것을 청합니다.” 최원을 옥에 가두고 문초하였으나 복종하지 않아서 끝내 죽였다.
따라서 명은 최원에 의해 공민왕 암살사건의 진상을 파악했을 것이다. 최원이 명에 사신으로 갔을 때에는 이인임으로부터 구체적인 지침을 받았을 것이다. 공민왕 암살사건과 채빈 살해사건에 대해서 이러저러하게 둘러대라고 말이다. 하지만 최원은 3년여 동안(명에 사신으로 갔던 신우 원년부터 고려에 돌아온 신우 4년까지) 명에 갇혀 지내면서 심경의 변화를 겪은 것 같다. 결국 최원은 명에 자초지종을 털어놓았으며, 고려로 돌아온 뒤에는 끝까지 소신을 지키고 죽었다. 공민왕 암살사건은 통설도 드라마틱하지만 진상 또한 드라마틱하다.
이인임
(3) 공민왕이 암살당하자 누가 피해를 보았는가?
공민왕의 암살로 가장 큰 이익을 본 사람들은 우왕의 정치적 후견인인 이인임과 그 일파였다.
그렇다면 피해를 본 사람들도 있을 것이다. 먼저 공민왕을 암살했다는 누명을 쓴 사람들이 피해자가 된다.
내시 최만생과 홍륜, 한안, 권진, 홍관, 노선 등의 자제위들은 (필자의 추측이 맞다면) 정말 억울한 누명을 쓰고 죽임을 당했다. 그 중에서도 홍륜은 공민왕 암살의 주범이라는 누명뿐만 아니라 익비를 임신시켰다는 누명까지 썼으며 『고려사』 「열전」 《반역》에 대표격(?)으로 입전(立傳)되어 있다.
이인임 일파는 왜 홍륜을 주요 타겟으로 잡았을까?
이 의문은 홍륜이 남양홍씨라는 명문 출신이며 공민왕의 외사촌 형인 홍언박의 손자라는 점을 인식해야 풀린다. 또한 홍륜의 부친인 홍사우가 꽤 뛰어난 무장이라는 점도 놓쳐서는 안 되겠다.
홍사우는 당시 남양홍씨 집안에서는 보기 드문(?) 군사적 재능의 소유자로, 제 2차 홍건적의 침입 때에는 수복경성공신 1등에 오른 바 있고, 덕흥군이 고려에 쳐들어왔을 때에도 참전한 바 있으며, 공민왕이 암살될 무렵에는 왜구를 막기 위해 전라도와 경상도 일대에서 동분서주하던 중이었다.
홍사우가 홍륜의 죄(?)에 연좌되어 죽임을 당했을 때에 경상도와 전라도 일대의 백성들 중에는 눈물을 흘리는 사람도 있었다고 한다. 이순신을 보는 듯 하다. 다시 말해 이인임 일파의 주요 공격목표는 남양홍씨였던 것이다(홍륜은 그 자체로는 그렇게 중요한 인물이 아니다.).
다음의 표는 자제위의 누명에 연좌되어 처벌받은 사람들을 정리해 놓은 것으로, 『고려사』의 「열전」 중 한방신(韓方信), 권용(權鏞), 권적(權適), 홍언박(洪彦博), 홍사우(洪師禹), 홍륜의 열전들을 바탕으로 만들었다.
남양홍씨 쪽이 다른 집안에 비해 더 큰 피해를 받은 것을 알 수 있다. 이인임이 남양홍씨를 집중적으로 타격하려 했던 이유는 신돈이 집권하던 시절의 악연 때문이었으리라고 추측된다. 신돈이 처형될 때 간신히 살아남은 이인임으로써는 신돈과 대립하던 남양홍씨를 경계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그리고 정말 중요한 피해자가 한 명 더 있다.
(공민왕이) 익비의 궁에 가서 김흥경, 홍륜, 한안 등을 시켜 익비와 사통하게 했으나 익비가 거부하자 공민왕이 칼을 뽑아 치려하였으므로 익비가 두려워서 공민왕을 따랐다.
익비 한씨는 공민왕이 암살당하자 비빈으로써 신하의 아이를 잉태했다는 불명예를 뒤집어쓰고 말았다. 하지만 공민왕이 노국공주를 두 번이나 임신시켰고 반야에게서 우왕을 얻었던 것을 고려한다면 익비가 임신한 아이 또한 공민왕의 아이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
또한 다음의 기록을 보라.
공민왕이 내전(內殿)에서 잔치를 벌이자 익비가 일어나 만수무강을 바라니 공민왕이 기쁜 표정으로 돌아보며 이르길 “나의 가까운 신하”라고 하였다. 이것은 사람들이 비난할 것이 두려워 스스로 감추려고 한 것이었다.
위의 기록을 보면, 기존의 선입견과 달리 익비는 노국공주 다음으로 공민왕의 총애를 받는 비빈이었을 가능성이 높다. 『고려사』의 편찬자는 익비에 대한 공민왕의 언급에 나름대로의 해석을 달아놓았지만 『고려사』의 편찬자가 무슨 수로 공민왕의 마음속을 들여다 볼 수 있었겠는가? 필자는 공민왕의 발언을 있는 그대로 해석하는 것이 가장 타당하다고 생각한다. 익비가 불명예를 뒤집어 쓴 것은, 익비가 이인임에게 위협적인 존재였음을 역설적으로 증명하는 것이다. 그 ‘위협’에 대해서는 뒤에 이어지는 글에서 설명하겠다.
신돈
(4) 사건의 진상1. - 신돈 잔당의 탄생
때는 신돈이 처형될 무렵인 1371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앞서 보았듯이 신돈이 처형될 때 조정 내의 신돈 도당 또한 타격을 받았다.
좌시중 이춘부, 참지문하부사 김란 등은 신돈과 운명을 같이 하겠다고 자청하여 결국 목숨을 잃었으며 그 외 많은 사람들이 벼슬을 빼앗기고 귀양을 갔다. 그런데 신돈 도당이면서도 희한하게 목숨을 부지한 사람들이 있었다. 바로 이인임, 왕안덕, 임박 등이다.
특히 왕안덕과 임박은 이춘부, 김란 등과 대조적으로 신돈을 죽이는 일에 앞장섰다.
신돈을 수원으로 귀양 보내고 이성림, 왕안덕을 시켜 압송했다. (중략) 찰방사 임박과 체복사 김규를 수원으로 보내서 신돈을 베었다(誅).
공민왕 입장에서도 신돈 도당을 모조리 숙청하기는 힘들었을 것이다. 공민왕이 죽으면 공민왕의 유일한 아들 모니노가 왕위를 잇게 된다. 하지만 모니노는 독자적인 친위세력을 마련하기가 힘든 처지였다. 보통 국왕의 친위세력은 국왕과 혈연으로 연결된 외척이나 국왕이 직접 선발해서 양성시킨 관료들로 이루어지기 마련이다. 하지만 모니노는 모친인 반야의 출신이 미천하여 외척에게 의지할 형편이 못 되었다. 또한 아직 어린 나이라 혼인을 통해 외척을 만들 형편도 아니었고, 믿을 만한 관료들을 심복으로 삼는 작업을 하기도 힘들었다. 그래서 공민왕은 신돈 도당 중 일부를 살려두고 그들을 모니노의 정치적 후견인으로 삼았다. 신돈 도당과 모니노는 결국 ‘신돈’이란 인물을 통해 긴밀히 엮여진 관계가 아니던가.
(공민왕이) 수시중(守侍中) 이인임에게 이르길 “원자(元子)가 있어서 나는 근심이 없다.” 고 하고 계속 말하길 “아름다운 여자가 신돈의 집에 있다는 말을 듣고 자식을 낳을 수 있다고 하여 가까이 하였더니 이 아이를 낳았다.”고 했다.
살아남은 신돈 도당에게는 모니노가 각별한 존재였을 것이다. 모니노의 존재 자체가 자신들의 안전을 보장해 주기 때문이다.
이때에 이르러 신돈이 주살되자 임박이 사관 민유의와 이지에게 이르길 “신돈을 주살한 것은 나라의 큰 경사요. 그리고 큰 경사가 하나 더 있으니 그대들은 알아두시오. 상(上. 공민왕 - 인용자)께서 궁인(宮人)을 가까이 하여 아들을 낳았는데 지금 이미 7세가 되었소. 그 아들을 신돈이 몰래 기르며 나라 사람들로 하여금 알지 못하게 했으니 이 또한 주살당해야 하는 죄요. 사관들은 마땅히 알아두시오.”
(4) 사건의 진상2. - 이인임 일파의 누명씌우기
그런데, 이 신돈 잔당(?)들의 안전을 위협하는 중대한 사태가 발생한다. 눈치 빠른 분들은 이미 짐작하셨을 것이다.
환자(宦者) 최만생이 어느 날 공민왕을 따라 변소에 갔다가 몰래 고하길 “신이 익비전에 갔더니 비가 말씀하시길 임신 5개월째라 합니다.”
익비의 아이가 공민왕의 아이일 것이라는 이야기는 앞서 한 바 있다. 박소희 작가의 만화 『궁』을 읽어보신 독자라면 이런 상황에 대한 이해가 빠르실 것이다. 중전이 임신을 하고 나니, 왕위계승 서열 2위이던 의성군 이율의 입지가 흔들리게 되지 않던가(그리고 실제로 중전은 아들을 낳는다.). 익비가 아들을 낳기라도 한다면 강녕부원대군으로 봉해진 우(모니노)의 입지는 위태로워질 수밖에 없다. 익비는 고려의 종실 출신이지만, 강녕부원대군의 모친 반야는 천한 신분이기 때문이다. 강녕부원대군은 적자가 아닌 서자인 것이다. 덕흥군이나 석기가 끝내 고려국왕이 되지 못했던 중요한 이유 중 하나는 그들이 서자였기 때문이다. 강녕부원대군 또한 비슷한 방식으로 왕위계승권을 박탈당할 수 있는 것이다.
물론 익비가 아들이 아닌 딸을 낳을 수도 있다(실제로 딸을 낳는다.). 하지만 신돈 잔당(?)의 입장에서 생각해 보자. 강녕부원대군이 왕위계승에서 밀려나면 공민왕은 더 이상 신돈 잔당(?)을 살려두어 강녕부원대군의 후견인으로 삼을 이유가 없어지고, 채하중이나 류탁의 경우처럼 이런저런 핑계를 대어 죽이려 들 가능성이 높아지는 상황에서, ‘익비가 딸을 낳을지도 몰라.....’ 라고 기대하는 것 자체가 너무 사치스러운 일 아니었겠는가? 특히 이인임은 공민왕의 반원 정책을 뒷받침하는 과정에서 겉 다르고 속 다른 공민왕의 모습을 많이 보아왔을 것이다. 결국 신돈 잔당(?)이 살기 위해서는 공민왕을 암살하고 익비가 자제위 홍륜의 아이를 임신했다는 누명을 씌우는 길 밖에 없었던 것이다. 익비의 아이를 홍륜의 아이로 만들어놓자니, 공민왕과 관련된 온갖 추잡한 소문을 날조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최영
신돈 잔당(?)들에게 참으로 다행스러웠던 점은, 익비가 임신했다는 소식이 퍼질 때에 최영이 개경에 없었다는 점이다.
최영은 목호를 진압하러 제주에 내려간 뒤, 아직 개경으로 돌아오지 않았던 것이다. 다음의 글을 잘 읽고 그 의미를 음미해 보시기 바란다.
제주 사람들은 농담처럼 이런 이야기를 한다. 제주도가 없었다면 조선 건국도 없었을 것이라고.
단순히 허풍만은 아니다.
거시적, 구조적으로 역사를 바라본다면 말이 안 될 이야기이지만, 미시적으로 한 개인의 삶을 따라가면 전혀 턱없는 이야기는 아니다.
최영 장군이 목호의 난을 토벌하고 나서 개경을 향해 제주를 떠났던 날은 1374년 9월 22일이다. 그런데 이 날은 날씨가 나빠 되돌아오고 말았다. 다시 다음날인 9월 23일. 드디어 참혹한 살상을 뒤로 하고 그는 제주를 떠났다. 그런데 그 무렵 개경에서는 커다란 사건이 하나 터졌다. 최영이 처음 제주를 떠났다가 역풍을 만나 다시 명월포로 돌아왔던 9월 22일, 공민왕이 시해되었던 것이다.
이 사건에서 최영의 빈자리는 결정적인 요인이었다. 공민왕의 실질적인 경호 책임자가 최영이었기 때문이다.
최영은 당시 정 2품 문하찬성사를 맡고 있었던 재상급 관료였으므로 “경호 책임자”라는 표현이 정확한 표현은 아니다. 어쨌든 공민왕을 든든하게 뒷받침해주는 강직한 무장인 최영이 없었다는 사실은 분명 신돈 잔당(?)들에게 고무적이었으리라. 최영이 없었기 때문에 공민왕이 변을 당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당시에 한두 명이 아니었던 것으로 보인다. 다음은 최영이 이성계와 조민수를 시켜 요동을 정벌하게 할 때 있었던 일화이다.
최영이 재삼 청하기를 “전하께서는 도읍으로 돌아가소서. 늙은 신하(최영 본인을 말한다. - 인용자)가 여기 머물며 여러 장수들을 지휘하겠나이다.” 라고 말하자 우왕이 말하길 “선왕(공민왕 - 인용자)이 해를 당한 것은 경이 남쪽을 정벌하러 갔기 때문이었다. 내가 어찌 하루라도 경과 떨어져 있을 수 있겠는가.” 라고 하였다.
공민왕 암살과 익비에 대한 누명 씌우기가 성공하고 나니 그 다음부터는 거칠 것이 없었다. 태후 홍씨와 경복흥(慶復興)이 판삼사사 이수산과 연합하여 끝까지 강녕부원대군의 등극을 막으려 했으나 이인임은 왕안덕 외에도 종실인 영녕군(永寧君) 유(瑜)의 지지를 얻어 결국 강녕부원대군을 등극시켰다. 정상적인 상황이었다면 나라의 어른인 태후의 뜻을 꺾기 힘들었을 것이다. 하지만 태후의 친정인 남양홍씨가 역적의 집안으로 몰린 상황이었으니 태후의 권위도 전처럼 강력하지가 못했으리라고 여겨진다.
1363년 김용의 난때 이강달의 기지로 공민왕이 목숨을 부지했던 흥왕사
(4) 진짜 진상3. - 그 외
실제 현장에서 공민왕에게 칼을 겨눈 사람은 누구일까? 이인임이 직접 칼을 들지는 않았을 것이다. 누가 이인임의 하수인 노릇을 했을까? 아무래도 사건현장을 최초로 목격한 사람에게 가장 큰 혐의를 둘 수밖에 없다. 마침 『고려사』에는 공민왕 암살사건의 최초 현장 목격자 이름이 나와 있다.
환자(宦者) 이강달이 먼저 침전에 들어가 피가 방에 가득 찬 것을 보고 거짓으로 “상(上. 공민왕 - 인용자)이 편찮으시다.”고 말한 뒤 문을 잠그고 출입을 금했다.
따라서 이강달을 가장 유력한 용의자로 지목하고자 한다. 이강달은 흥왕사의 변에서 공민왕을 구한 공로가 있고, 부시피난공신 1등, 신축호종공신 1등에 봉해진 바가 있다. 하지만 신돈이 죽고 얼마 안 되었을 때, 공민왕의 총애를 믿고 도당(都堂)에 들어가 거만하게 행동하다가 공민왕에 의해 옥에 갇힌 적이 있었다. 이 과정에서 공민왕에게 원한을 가지게 되었을 수 있다. 또는 공민왕에 대한 불신이나 공포를 느꼈을 수도 있을 것이다.
그리고 신돈 잔당(?)들 중 임박에 대한 이야기를 하지 않을 수 없다. 임박은 이인임이나 왕안덕과는 조금 다른 사람이다. 임박은 신돈이 살아있을 때에도 이인임하고의 사이가 그리 좋지 않았으며 우왕이 즉위하고 나서는 이인임의 친 북원 정책에 반대했다. 이인임으로써는 동지로 삼기에 미덥지 못했을 것이다. 따라서 임박이 공민왕 암살에 개입하지는 않았으리라고 여겨진다. 하지만 임박도 신돈 잔당(?)인만큼 공민왕의 죽음에 대해 나름의 안도감을 느꼈을 수 있다. 그래서 우리는 다음의 기록을 놓치지 말아야 한다.
공민왕이 죽은 다음 날 임박이 빈소 곁에서 이를 드러내고 웃었다. 빈전도감(殯殿都監) 판관(判官) 류원정(柳爰廷)은 (중략) 임박을 보고 책망하여 말하기를 “선왕(先王. 공민왕 - 인용자)께서 일찍이 그대를 사직의 신하가 될 것이라 하셨는데 지금 그대가 슬픔을 잊고 웃으니 이것은 충신이 아니오.” 라고 했다.
이상이 필자가 『고려사』와 『명사』 「조선열전」 등의 자료들을 들여다보며 재구성한 공민왕 암살사건의 진상이다.
이인임 등은 강녕부원대군을 성공적으로 즉위시키자 제일 먼저 다음과 같은 일을 단행한다.
"신돈 도당(黨)의 죄를 용서(宥)한다."
(5) 심양왕파가 공민왕을 암살했다는 주장에 대한 비판
공민왕의 암살에 대해서는 다른 해석을 내리는 사람들도 있다. 공민왕의 7촌 조카인 심양왕 톡토부카[篤朶不花]를 지지하는 세력이 고려에 있었는데, 그들이 톡토부카를 고려국왕으로 옹립하여 북원과 화친하고 명에 맞서기 위해 공민왕을 암살했다는 것이다.
이 주장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이 반박하고자 한다. 공민왕이 기철 등을 처단하여 반원 정치의 깃발을 든 때가 1356년이었고, 덕흥군을 앞세운 몽골의 침입을 막아내어 자기 보위의 정통성을 지킨 때가 1364년이었다.
그 외에도 공민왕은 몽골제국과 이런저런 이해관계로 얽힌 사람이 있다 싶으면 주저하지 않고 죽음을 내렸으며, 개중에는 채하중처럼 악질적인 부원배이기는 했으나 죽어야 할 이유가 석연찮은 사람들도 있었다. 간단히 말해, 공민왕이 죽은 1374년의 시점에서 소신을 가지고 친원 정책을 이어가던 사람이 존재했을 가능성은 매우 드문 것이다. 실제로 1375년 8월에 톡토부카가 공민왕 사망 소식을 듣고 고려국왕 자리에 오르려 북원의 지원을 받아 압록강 가까이 이르자, 고려 조정은 왜구에 시달리는 와중에도 일치단결하여 서북면 일대의 방비를 강화해 북원을 한발 물러서게 만든다.
공민왕 암살이 심양왕 지지 세력에 의해 저질러졌다는 추측은 당시 정황을 정확히 이해하지 못하였기 때문에 나온 것이다.
조선의 태조 이성계
(6) 최종 수혜자 이성계
이인임은 1388년(우왕 14년) 1월에 정치적으로 실각하여 자신의 본관인 경산부(京山府. 지금의 성주)로 귀양을 갔으며 그 해에 죽는다.
이인임이 몰락했으니 공민왕 암살사건의 진상이 드러날 수 있었던 상황이었는데, 공교롭게도 그 해 3월에 명이 고려에 철령위(鐵嶺衛)를 설치하겠다는 통고를 해 왔다. 철령(함경남도와 강원도 사이에 있다.) 이북을 고려로부터 빼앗겠다는 것이다.
그 이후에 전개된 상황은 다들 아시는 대로이다.
이성계는 5월에 위화도회군(威化島回軍)을 단행하여 최영을 축출하고 우왕을 폐위시킨 뒤 고려의 실권자가 되었다.
1392년에는 드디어 스스로 왕이 되었으며 1393년에 정식으로 ‘조선’이란 국명을 쓰기 시작했다.
우왕을 폐위시키고 스스로 왕이 되려는 이성계의 입장에서 볼 때 공민왕에 대한 온갖 추잡한 소문은 자기 행동을 정당화시키는 근거가 되었을 것이다. 앞서 이야기한 것처럼 공민왕을 동성애자나 이상성욕자처럼 묘사해야 우왕이 공민왕의 아들임을 부정할 수 있고, 우왕이 공민왕의 아들이라는 점이 부정되어야 자신이 떳떳해질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인임이 죽고 난 뒤에도 공민왕 암살사건의 진상은 밝혀지지 않고 계속 묻혀 졌다. 오히려 조선에서는 공식 사서(史書)인 『고려사』에 공민왕의 추잡한 소문을 적어 넣어 ‘낭설(浪說)’에다가 ‘기록(記錄)’의 권위를 부여하였다. 이인임의 공민왕 암살은 이성계에게 가장 큰 선물을 가져다 준 셈이다.
개인적으로는 명에서 이성계를 이인임의 아들로 오해한 것도 이러한 점과 관련이 있지 않을까 생각한다.
이인임이 결과적으로 이성계를 국왕의 자리에 올려놓았기 때문이다.
* 이상이 공민왕 암살사건에 대하여 제가 썼던 글입니다.
당연히 저는 공민왕을 둘러싼 추잡한 소문들을 거의 다 누명이라고 생각합니다.
그 누명이 벗겨지기를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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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서에서 전하는 공민왕의 각종 엽색 행각들에 대해서는 조선초 사가들에 의해 날조되었을 가능성에 대해서는 어느정도 공감대가 형성되어 있다고 본다.
하지만 그 반박기록의 부재로 인해 이를 반박할 강력한 증거가 발견되기전에는 기존의 통설을 정설로 받아들여야 한다는 견해가 지배적인것 같아 안타깝다.
위 글의 작성자인 자중자애님은 그 반박 근거로 고려사 간신열전 이인임편과 명사 조선열전의 일부 등을 제시하였다. 이 정도면 재평가의 근거로 충분하다고 본다.
애석하게도 '정도전' 2화에서 그려진 공민왕 시해의 장면에서는 이러한 의혹을 시원스럽게 풀고 가기보다는 기존의 통설을 그대로 답습하는데 그쳤다.
단지, 시해 직전 공민왕의 각성 모습을 그려내었고 이인임의 개입을 포함시켰다는 정도...
하지만 앞으로를 더 기대해보고자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