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中原史

중국 전국시대 4대 명장 中國 戰國時代 四大名將


인터넷을 떠돌아다니다보면 무슨무슨 '4대천황'이니 '3대장'이니 하면서 어떠한 분야에 빼어난 존재감을 지니고 있는 대상들을 몇명씩 엮어서 떠받드는 풍조가 만연해 있다.

이러한 현상은 비단 우리나라에서만 발견할 수 있는 것은 아닐 것이다.
추측컨데, 가깝게는 옆 열도의 나라에서도 이러한 풍조가 자리잡고 있고
왼편 대륙쪽에서도 예로부터 무협소설의 영향으로 '9파1방' '5대세가' 와 같은 관용어구가 발달 되어 있지 않을까 싶다. 

어쨌든 이 방면에서 우리나라를 따라올 나라는 없을 것으로 사료 된다.
'세계7대 불가사의'니 '3대 해전'이니,,,

확실한건 대부분의 이러한 형용어구는 출처미상으로 누군가가 그럴듯하게 갖다 붙힌 것이 통용되고 있다는 것이다.
공신력을 갖춘 저명한 학자나 유수의 기구가 확립한 그루핑이 절대 아니다.

때문에 누군가가
'한산도대첩은 살라미스 해전, 레판토 해전, 트라팔가 해전과 더불어 세계 4대 해전으로 꼽힌다는데 정말인가요?'
이러한 질문을 한다면 공식적으로 주요 해전들을 묶어서 정리한 인물이나 기관은 분명히 없으며,
굳이 그렇게 엮이지 않더라도 -세계 유명 사가들한테 칭송받지 않더라도- 한산도 대첩은 충분히 자랑스러워 할 만한 이 나라의 빛나는 역사라고 답해주고 싶다.




물론 이런 부분들은 매우 흥미를 끄는 요소들이다.
우리의 역사를 외국의 다양한 사람들이 알고 흥미를 가져준다면 우리 입장에서 매우 신기하고 반가운 일이다.
그렇지만 반대로 알아주지 않는다고 해서 우리의 역사의 가치가 떨어지는 것도 아니므로 그런 것에 집착하지 말았으면 한다.

'전국시대 4대 명장' 이란 관용어도 어느 정도 보편화 되어 있다.
아마도 최근 들어 상당한 인기를 구가하고 있는 중국 전국시대 말미를 배경으로 연재되고 있는 일본의 역사 만화 '킹덤'의 영향이 클 것으로 생각 된다.

하지만 이는 위에 예시로 든 사례들과는 달리 아주 명확한 출처가 있는 분류라고 할 수 있다.
그 출처라는것이 바로 천자문인데, 천자문에는 起翦頗牧用軍最精(기전파목용군최정)이라는 문구가 있다.
풀이하자면 '백기, 왕전, 염파, 이목 등은 군사를 부리는데 있어 전혀 빈틈이 없었다.'라는 뜻인데,
아마 이 문구에서 전국시대 4대 명장이라는 명칭이 유래 되지 않을까 싶다. 

 



천자문은 중국 5대10국 시대 남조(南朝) 양(梁)의 주흥사(周興嗣:470?∼521)가 글을 짓고 동진(東晉)의 왕희지(王羲之)의 필적 중에서 해당되는 글자를 모아 만든 것이므로 적어도 1500년전에서부터 위 4명의 장군을 한데 묶어서 추앙하는 풍조가 있었다고 봐도 무방할 듯 싶다.

그렇다면 이 대단한 4명의 인물들에 대해서 한 명씩 살펴보겠다.



진 무안군 백기 秦 武安君 白起 (? ~ BC 257)



생년 미상. 전국 시대 말기 진(秦)나라 미현(郿縣) 사람으로 본명은 공손기(公孫起).
용병술에 뛰어난 재능을 보여 중국사 최강의 지휘관으로 꼽힌다.

진소왕(秦昭王)에게 등용되어 소양왕 13년 좌서장(左庶長)으로 군대를 이끌고 한(韓)나라를 공격했다.
다음 해 좌경(左更)이 되어 한나라와 위(魏)나라의 연합군을 이궐(伊闕)에서 격파하고 24만 여명을 죽인 다음 국위(國尉)로 승진했다.

소왕 15년 대량조(大良造)에 올랐다. 위나라, 조(趙)나라 등 싸우는 대로 대승을 거두었으며, 한나라와 위나라, 조나라, 초(楚)나라 등의 70여 개 성을 탈취했다.




소왕 29년 초나라의 수도 영(郢)을 공격해 함락시키고, 무안군(武安君)에 봉해졌다.
장평(長平) 전투에서 조나라 군대에 대승을 거둔 다음 항복한 조나라 군사 40여만 명을 하룻밤 사이에 구덩이에 묻어 죽여 천하를 경악시켰다.

백기의 위명이 전 중국에 널리 떨치게 되자 이윽고 상국(相國) 범수(范雎)도 그를 꺼리게 되었다.

소왕 50년 진나라가 한단(邯鄲)을 포위했다가 실패했는데, 원래 이 전투에 찬성하지 않아 병을 핑계로 참전하지 않았다. 이로 인해 사오(士伍)로 강등되고, 재상 범수와 틈이 벌어져 자결하고 말았다.




사마천의 사기에서 전하는 백기의 주요 전적

소양왕 13년 : 좌서장 백기가 신성을 공략하였다.

소양왕 14년 : 좌경 백기가 이궐에서 한나라와 위나라를 공격하여 24만 명의 목을 베고 공손희를 포로로 잡았으며, 5개 성을 점령하였다. 백기는 이 공로로 국위에 임명되었다. 뒤이어 황하를 건너 한나라의 안읍에서부터 동쪽을 취하여 간하에 이르렀다.

소양왕 15년 : 대량조 백기가 위나라를 공격하여 크고 작은 성 61개 성을 빼앗고 원을 빼앗았으나, 다시 위나라에 돌려주었다. 또한 초나라를 침공하여 완을 빼앗았다.

소양왕 27년 : 백기가 조나라를 침공하여 대의 광랑성을 빼앗았다.

소양왕 28년 : 대량조 백기가 초나라를 침공하여 언과 등을 빼앗고 죄인을 사면하여 이곳으로 이주시켰다.

소양왕 29년 : 대량조 백기가 초나라를 침공하여 영을 함락시키고, 이릉을 불태웠으며, 동쪽으로 경릉에 이르렀다.
초경양왕은 두려워서 언영을 떠나 동쪽의 진으로 옮겨갔다고 합니다. 그리고 이 승세를 타서 백기는 무군과 검중군을 취하였다.

소양왕 34년 : 백기는 위나라를 공격하여 화양을 함락시켰고, 망묘를 패주시켰으며, 삼진(三晉)의 장수를 포로로 사로잡고, 13만 명을 참수하였다. 조나라의 장수와 가언과 싸워서는 황하에다가 가언의 병졸 2만 명을 수장시켰다.

소양왕 43년 : 백기는 한나라의 형성을 공격하여 5개 성을 함락시키고 5만 명을 참수하였다.

소양왕 44년 : 백기는 남양 태행산의 구불구불한 비탈길을 공격하여 끊어버렸다.

소양왕 45년 : 백기는 한나라의 야왕을 공격하여 차지하였다.

소양왕 47년 : 진은 무안군 백기를 보내 공격하여 장평에서 조군을 크게 무찌르고 40만여 명(정확하게는 45만 명)을 모두 죽였다.





사서에서 전하는 수를 액면 그대로 받아들일 경우 백기가 교전을 통하여 주살한 적병의 수는 공식적으로 확인 된 숫자만 165만명에 달한다.

민간인들을 대규모로 학살한 숫자가 아니라 궤멸시킨 적군사의 숫자라는 부분이 믿어지지 않는다.
물론 그 중의 상당 수는 항복한 포로를 모조리 참살한 경우에 해당하겠지만 사로잡은 포로의 규모가 도무지 감당이 되지 않아 이런 대규모 학살을 자행했을 터이니 역으로 그 전공의 위력이 너욱 무섭게 느껴질 따름이다.


요즘 최고의 인기를 구가하고 있는 히라 야스히사의 역사 만화 킹덤에서의 묘사에 의하면 영정의 치세 秦을 멸하기 위해 출별한 6국의 합종군에 나라 전체가 위태위태하게 보이지만 이는 작중 긴장감을 고조시키기 위한 픽션으로 실제 역사 속에서의 합종군은 함곡관에서 아주 간단하게 와해 된다.

진나라의 패권에 6국이 위협을 느끼고 대처해보려는 움직임은 있었으나 너무 늦은 시점이었다. 이미 당대에 진나라의 국력은 모든 나라들을 압도하고도 남을 정도의 위치였던 것이다. 이런 배경은 함곡관 전투로부터 약 100년 전에 상앙에 의해 강력하게 시행된 변법과 거의 반세기에 걸쳐 재위하면서 전 중원을 휩쓸고 다녔던 소양왕의 활약 등으로 자연스레 형성 되었다. 


▲ 소양왕 昭襄王


소양왕 대에 사실상 통일이 되었다고 보는 견해가 유력하다.
그 소양왕 시대에 일선 전선에서 가장 압도적인 활약을 보인 인물이 바로 백기다.
유구한 중국의 전 역사를 통틀어 최강의 군 통솔자로 백기를 꼽는데는 거의 이견이 없다.




진 무성후 왕전 秦 武成侯 王翦


중국 전국시대(戰國時代)의 장수(將帥)로서 빈양(頻陽) 동향(東鄉, 지금의 산서성 부평 陝西省 富平) 출신이다. 


아들인 왕분(王賁)과 함께 시황제(始皇帝)의 천하통일(天下統一)에 크게 기여하였으며, 백기(白起), 염파(廉頗), 이목(李牧) 등과 함께 전국시대(戰國時代) 4대 명장(名將)으로 꼽힌다. 


기원전 236년부터 그와 관련된 기록이 사서(史書)에 나타난다.
이 해에 왕전(王翦)은 나중에 시황제(始皇帝)가 되는 진왕(秦王) 정(政)의 명을 받아 조(趙)의 알여(閼與, 지금의 山西省 和順)를 공격해 장수이[漳水] 유역의 아홉 개 성을 빼앗았다. 그리고 기원전 229년 다시 조(趙)를 공격하여, 이듬해에 기원전 228년에 한단(邯鄲, 지금의 河北省 邯鄲)을 점령해 조(趙)를 멸망시키고 진(秦)에 합병했다.



조 공략 당시 조나라는 약 30여년전 백기에 의해 자행된 장평 학살로 인해 40만의 장병을 하루 아침에 잃어버리고 그야말로 휘청 거리면서 간신히 버티고 있던 상황이었다.
이렇게나마 버텨낼 수 있었던 요인중 하나가 바로 명장 이목의 존재였다.

출정할 때마다 나라를 1개씩 멸망시켰던 왕전 조차도 정면대결로는 이목을 격파하기 어렵다고 판단,
반간계를 써서 조나라의 간신 곽개를 매수하여 이목을 모함하고 조왕 천이 이에 넘어가서 이목을 참수하게 된다.

결국 유일한 버팀목이었던 이목 마저 사라진 조나라는 그로부터 3개월도 채 지나지 않아 수도 한단이 왕전에게 함락되고 그 운명을 마감하게 된다.





조 멸망 후 기원전 224년, 시황제는 신하들을 소집하여 초(楚) 정벌 계획을 의논하였는데, 젊은 장수인 이신(李信)은 20만의 병력이면 정벌할 수 있다는 의견을 밝혔지만, 왕전은 60만의 병력이 아니면 어렵다고 했다. 

시황제는 왕전이 이미 늙었다며 이신과 몽염(蒙恬)을 장군으로 삼아 20만의 병력으로 초를 공격했다. 왕전은 병을 핑계로 벼슬에서 물러나 고향으로 갔다. 


여기서 말하는 이신이 바로 만화 킹덤의 주인공이다.


이신과 몽염은 부대를 둘로 나누어 초(楚)를 공격하였고, 초기에는 큰 승리를 가두었다. 하지만 이신의 부대가 초나라의 명장 항연(項燕)이 이끈 초군의 기습을 받아 크게 패하면서 진군은 오히려 역공을 받아 위기에 빠졌다. 


이에 시황제는 직접 빈양으로 찾아가 왕전을 다시 장군으로 삼았다. 

왕전은 60만의 병력을 이끌고 초로 출병하였으며, 시황제는 직접 파상까지 나와 환송하였다.
당시 왕전은 시황제에게 출병의 대가로 가장 좋은 논밭과 저택을 하사해 달라고 청하며, 진군(進軍) 도중에도 여러 차례 이를 다시 강조하였다. 


부장이 지나친 행동이 아니냐고 하자, 왕전은 시황제가 의심이 많아 남을 잘 믿지 않으므로 재산에만 관심을 두고 있는 것처럼 보여야 후환을 없앨 수 있다고 밝혔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아마도 자신을 능가하는 군공을 세우고도 범수의 시기를 받아 실각했던 전국시대 4대명장의 필두 백기의 사례가 이러한 퍼포먼스에 영향을 끼쳤을 거라는 추측이 지배적이다. 바꿔 말하면 군략 외에 처세에도 상당히 능한 면모라고도 볼 수 있다.





초군과의 전투에서 왕전은 나아가 싸우지는 않고 성채를 굳건히 하여 지키기만 했다. 

초군이 싸움을 걸어와도 응하지 않았으며, 병사들에게 충분한 휴식과 음식을 주며 체력을 쌓을 수 있도록 했다. 


진군이 싸우려 하지 않고 방어만 하자 초군은 방심하여 병력을 동쪽으로 철수시켰는데, 왕전은 곧바로 전군을 이끌고 퇴각하는 초군을 기습했다. 

일방적인 도륙 끝에 진군은 큰 승리를 거두었으며, 초의 도읍인 수춘(壽春, 지금의 安徽省 壽縣)까지 쳐들어가 초왕(楚王) 부추(負芻)를 사로잡고 초(楚)를 멸망시켰다. 


왕전은 여세를 몰아 장강(長江)을 건너 남진(南進)하여 백월(百越)까지 공략하였다. 



▲ 왼쪽부터 이사, 시황제, 그리고 왕전


왕전은 조(趙), 연(燕), 초(楚) 지역을 합병하는 데 큰 공을 세워 무성후(武成侯)로 봉해졌다. 그의 아들인 왕분(王賁)도 위(魏), 연(燕), 제(齊) 지역의 합병에 큰 공을 세워, 왕전과 왕분 부자는 몽무(蒙武), 몽염 부자와 함께 시황제의 천하통일에 가장 큰 군공(軍功)을 세운 인물들로 꼽힌다. 

그의 손자인 왕리(王離)도 진의 무장으로 활약했지만, 기원전 207년 거록(鉅鹿) 전투에서 항우(項羽)에게 패하여 사로잡혔다. 항우는 이신을 격파했던 항연의 손자다.

 

 
조 신평군 염파 趙 信平君 廉頗


전국 시대 조(趙)나라 사람. 조나라 혜문왕(惠文王) 때 장(將)이 되고, 나중에 상경(上卿)으로 승진했다.
제(齊)나라와 위(魏)나라를 공격해 여러 차례 크게 이기고 제나라의 기(幾)와 위나라의 방릉(防陵), 안양(安陽) 등지 등 많은 땅을 빼앗았다. 


전국시대 4대명장 외에 흔히 노장의 대명사로 알려졌으나, 워낙 늙어서도 출중했기 때문에 그럴 뿐 실제로는 젊은 시기부터 두각을 나타냈다. 전국시대에 가장 뛰어난 명장중 한 명으로 꼽힐정도로 탁월한 장수인 동시에 정치가로서도 안목을 갖춘, 문무겸비한 인물.





염파가 활약하던 시기 조나라는 무령왕(武靈王)이 시행한 개혁의 결과로 영토와 국력이 크게 신장된 상태였고, 

이러한 국력을 바탕으로 평원군, 인상여, 조사 등 걸출한 인재가 잇달아 등장하면서 전성기를 구가하고 있었다.


장평(長平) 전투에서 견고하게 수비하여 진나라 군대가 3년 동안 출병했지만 얻은 것 없이 돌아가게 만들었다.
나중에 조나라가 진나라의 반간계에 걸려 해직하고 조괄(趙括)을 장수로 기용해 대패했다.


만약 전장에서 염파가 이탈하지 않았다면 장평학살 같은 비극은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효성왕(孝成王) 15년 연(燕)나라가 대군을 일으켜 침입하자 오히려 역공을 취해 연나라 장수 율복(栗腹)을 죽이고 연나라의 수도를 포위한 뒤 5개 성을 할양받고 화친을 맺었다. 이 공으로 위문(尉文)에 봉해졌고, 신평군(信平君)이 되어 가상국(假相國)에 임명되었다. 


도양왕(悼襄王) 때 고령을 이유로 지휘권을 낙승(樂乘)으로 대신하게 하자 반란을 일으키고 위나라로 달아나 대량(大梁)에서 살았다. 
나중에 초(楚)나라에서 늙어 죽었다. 


비록 마지막에는 고국을 등지게 된 샘이나 조나라 최후의 보루 그와 더불어 같이 전국시대 4대명장으로 꼽히는 이목을 천거함으로써 실낱같은 희망은 이어갈 수 있게 하였다.



▲ 육단부형. 인상여에게 사죄하는 염파. 이렇게 '문경지교'가 탄생한다.


절친한 사이를 의미하는 '문경지교刎頸之交'는 염파와 인상여 사이의 일화에서 비롯 되었다. 

既罷帰國, 以相如功大, 拝為上卿, 位在廉頗之右. 廉頗曰:「我為趙將, 有攻城野戦之大功, 而藺相如徒以口舌為勞, 而位居我上, 且相如素賎人, 吾羞, 不忍為之下.」宣言曰:「我見相如, 必辱之.」相如聞, 不肯與會. 相如毎朝時, 常稱病, 不欲與廉頗爭列. 已而相如出, 望見廉頗, 相如引車避匿. 於是舎人相與諫曰:「臣所以去親戚而事君者, 徒慕君之高義也. 今君與廉頗同列, 廉君宣悪言而君畏匿之, 恐懼殊甚, 且庸人尚羞之, 況於將相乎! 臣等不肖, 請辭去.」藺相如固止之, 曰:「公之視廉將軍孰與秦王?」曰:「不若也.」相如曰:「夫以秦王之威, 而相如廷叱之, 辱其群臣, 相如雖駑, 獨畏廉將軍哉? 顧吾念之, 彊秦之所以不敢加兵於趙者, 徒以吾両人在也. 今両虎共鬥, 其勢不倶生. 吾所以為此者, 以先國家之急而後私讎也.」廉頗聞之, 肉袒負荊, 因賓客至藺相如門謝罪. 曰:「鄙賎之人, 不知將軍寛之至此也.」卒相與驩, 為刎頚之交

회합을 마치고 돌아오자, 조나라 왕은 상여의 공이 크다고 해 그를 상경(上卿)에 임명했으니, 그것은 염파보다 윗자리였다.

그러자 염파는 “나는 조나라 장수로서 전쟁에서 큰 공을 세웠다. 그러나 인상여는 겨우 입과 혀를 놀렸을 뿐인데 지위는 나보다 높다. 게다가 상여는 본래 천한 출신이니, 나는 부끄러워 도저히 그의 밑에 있을 수 없다”라고 말하고는 “내 상여를 만나기만 하면, 기어코 모욕을 주리라”라고 공언했다.

이 말을 들은 상여는 될 수 있으면 그와 만나지 않으려고 했다. 조회가 있을 때마다 언제나 병을 핑계로 나가지 않았으니, 염파와 자리 순서를 놓고 다투기 싫었기 때문이었다. 또한 상여는 외출을 했다가 멀리 염파가 보이면 수레를 끌고 피해서 숨곤 했다. 그러자 상여의 가신들이 모두 그에게 말했다.

“신들이 가족, 친척을 버리고 상공을 모시는 것은, 오직 상공의 높으신 의로움 때문입니다. 지금 상공께서는 염파 장군과 서열이 같으시면서, 염장군이 상공께 욕을 하는데도 그가 두려워서 피해 숨으시며, 지나칠 정도로 무서워하고 계십니다. 이는 보통 사람들도 부끄러워하는 일이니, 하물며 장군이나 대신들은 어떻겠는지요? 저희 못난 인간들은 이만 하직하고 물러나고자 합니다.”

그러나 인상여는 그들을 끝내 만류하며 말했다. “그대들은 염장군과 진나라 왕 중 누가 더 무섭다고 생각하오?” “염장군은 진나라 왕을 당할 수 없지요.” “나는 진나라 왕의 위세에도 불구하고 조정에서 그를 질타하고 그의 신하들을 모욕했소. 내가 아무리 노둔하다고 할지라도 염장군을 두려워할 리가 있겠소? 그러나 지금 사정을 살펴보면, 강한 진나라가 우리 조나라를 공격하지 못하는 것은 오직 우리 두 사람이 있기 때문이오. 만일 지금 우리 두 호랑이가 다투게 되면, 둘 다 무사할 수 없는 상황이오. 내가 이렇게 염장군을 피하는 것은, 나라의 위급함을 먼저 생각하고, 개인적인 원한은 뒤로 돌리기 때문이오.”

이 말을 전해들은 염파는 어깨를 드러내고 가시나무 채찍을 등에 지고서, 인상여의 집 문 앞에 이르러 사죄했다. “더럽고 천박한 인간이 장군께서 이토록 너그러우신지 미처 몰랐소.” 이리하여 두 사람은 마침내 화해를 하고 문경지교를 맺었다.

《사기(史記)》 〈염파인상여전(廉頗藺相如傳)>



조 대장군 이목 趙 大將軍 李牧 (? ~ B.C. 228)



염파의 천거로 장군이 된 인물로 춘추전국시대 말기 최고의 명장으로 북방을 지키면서 10여년 동안 흉노들을 상대로 싸워 그들을 벌벌 떨게 할 정도로 명성을 날렸다. 중원이 전장의 혼돈속에 허우적 대고 있을때 북방 이민족들의 위협을 막아냈던 인물로 전국시대 4대명장에 당당히 이름을 올리게 된다.

사실 그가 부임한 후 한 일은 군사들을 잘 먹이고, 쉬게 하고, 훈련시키는 지극히 상식적인 지시들이었다.

흉노족이 침공해 오면 민간인이건 병사들이건 응전하지말고 우선 성안으로 피신하도록 하여 인적, 물적 피해를 최소화하는 방식이 그가 유목민족들을 상대하는 전략이다.

이러한 대응으로 인해 흉노족은 이목을 만만히 보고 대대적인 공격을 감행했다가 궤멸되고 향후 십년 동안은 중원에 얼씬거릴 생각을 못하게 된다.


조왕 천의 요청을 받아 대장군에 임명되어 이목은 사마상과 함께 군사를 이끌어 기원전 243년에 연나라에게 대승을 거둬 무수, 방성땅을 함락하고 기원전 233년에는 진나라 군사들을 죽여 의안에서 대파했으며 기원전 232년에는 진의 대군을 업과 번오에서 대패시킨다.


이에 진나라는 기원전 229년에 백전노장 왕전과 양단으로 하여금 합동작전을 펼쳐서 조나라의 수도 한단으로 출동시키지만 여기서도 이목은 진나라 군사를 대패시켜 멸망의 위기를 극복한다.




기원전 228년에 이목이 있는 한 조나라를 멸망시키기 힘들 것이라고 판단한 진나라는 조나라의 간신 곽개를 매수하고 모함하게 하여 반간계를 구사하자 반간계에 속아서 그를 의심한 조왕 천에 의해 참수된다.


이후 소기의 목적을 달성한 진나라는 그가 사망하자 바로 조나라를 대대적으로 침공하여 석 달도 안돼서 수도인 한단성을 함락시키고 조왕 천을 사로잡아 조나라는 멸망하게 된다. 



백기, 왕전, 염파 등과 나란히 전국시대 4대명장으로 칭송되고 있으나 열전 작성은 가장 늦게 되었다.

이목의 손자가 바로 한신도 경계한 전략가 초한쟁패기 조나라의 광무군 이좌거였다고 한다.




* 사진 출처 : 구글이미지 (http://www.google.com/imghp?hl=ko)

** 사료 출처 : 사마천 사기, 리그베다 위키(http://rigvedawiki.net/r1/wiki.php),  .
네이버 지식백과(http://terms.naver.com) 등